팬데믹 이후 경영평가 '칼날' 세져... 보잉·나이키·인텔 등 대표기업 포함

미국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퇴임이 역대 최고 수준으로 급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엄격해진 경영 평가와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이 CEO들의 대규모 교체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26일(현지시각) 미국 고용조사기업 '챌린저, 그레이&크리스마스'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4년 1월부터 11월까지 미국 기업 CEO 1991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는 2023년 기록한 1914명을 넘어선 역대 최고치다. 상장 기업만 놓고 봐도 327명이 CEO직을 내려놓아 2023년 전체(300명)를 이미 넘어섰다.
퇴임한 CEO 중에는 항공기 제조사 보잉,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 반도체 기업 인텔 등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다수 포함됐다. 유럽에서는 자동차 대기업 스텔란티스의 CEO가 임기 도중 사임했다.
앤드루 챌린저 '챌린저, 그레이&크리스마스' 부사장은 "코로나19 위기 동안 기업들은 리더를 유지하며 위기를 버텼지만, 팬데믹이 진정되자 지난 몇 년간 리더들이 역할을 어떻게 수행했는지 평가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위기대응 능력에 의문이 제기된 CEO들이 대거 교체 대상이 된 것이다.
특히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이 거세졌다. 바클레이즈(Barclays)에 따르면 시가총액 5억 달러(약 7165억 원) 이상인 미국 기업 CEO 중 27명이 행동주의 펀드 영향으로 퇴임했다. 이는 지난 4년 평균인 16명을 크게 웃도는 수치다. 헬스케어 기업 CVS헬스, 커피 체인 스타벅스, 미디어 기업 파라마운트 글로벌, 여행 사이트 익스피디아 등도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에 CEO를 교체했다.
짐 로스먼(Jim Rossman) 바클레이즈 주주 자문 부문 책임자는 "지난 2년간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된 미국 CEO의 퇴임률은 20%로, S&P 500 평균 12%를 웃돌았다"고 말했다. 특히 2024년 행동주의 펀드의 압박으로 CEO가 물러난 경우는 과거 4년 평균인 16명을 훨씬 웃도는 27명으로, 압박의 강도가 거세졌음을 보여준다.
이런 변화에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최근 전략 변경이 작용했다. 바클레이즈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행동주의 펀드 활동에서 2021년에는 '인수합병(M&A) 관련' 요구가 43%를 차지했으나, 2024년에는 22%로 감소했다. 대신 '전략과 현장 개선' 요구가 26%로 증가했다.
패트릭 터커(Patrick C. Tucker) FTI 컨설팅 수석 매니징 디렉터는 "최근 1~2년간 M&A 관련 요구 대신 경영진 책임 추궁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분석했다.
M&A 시장 침체도 이러한 변화를 부추겼다. 베인앤코(Bain & Company)에 따르면 2021년 6조 1000억 달러(약 8741조 3000억 원)에 달했던 전 세계 M&A 시장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3조 달러(약 4299조 원)대에 머물렀다. 코로나19 이후 매도자와 매수자 간의 가격 차이가 커지고, 금리 인상으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진 탓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바이든 지난 정부의 반독점 규제 강화로 M&A가 위축됐다. 리나 칸(Lina Khan) 연방거래위원회(FTC) 위원장은 사모펀드의 '롤업'(Roll-up, 연속적 인수·합병) 전략이 시장 독점을 초래한다고 비판하며 M&A 심사를 강화했다. 이에 따라 행동주의 펀드들은 M&A 대신 경영진 교체를 통한 기업 가치 제고에 집중하게 됐다.
기업 내부에서도 CEO 교체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PwC가 미국 상장 기업 이사 52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최소 1명의 이사를 교체하고 싶다'고 답했다. '2명 이상'이라고 답한 비율도 25%에 달했다.
스타벅스의 경우 엘리엇 매니지먼트 등 행동주의 펀드들이 지분을 확보한 후 CEO를 교체했다. 후임 CEO로 선임된 브라이언 니콜(Brian Niccol)은 과거 대형 외식 체인에서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니콜 CEO는 취임 후 중국 사업 일부 매각을 검토하는 등 적극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
미국 기업 변호사들과 투자은행 관계자들은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서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했다. 법인세 감세와 주식 매각 이익 과세 인하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한 미국 전략 커뮤니케이션 기업 관계자는 "트럼프 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주가가 상승 추세에 있으며, 행동주의 펀드의 제안이 가치 향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켜 주가가 상승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칼 아이칸(Carl Icahn) 미국 행동주의 투자자는 월스트리트저널에 "바이든 전 정부는 많은 M&A를 방해했지만, 트럼프가 재집권함에 따라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엘리엇은 트럼프 당선 직후인 11월 12일 하니웰 인터내셔널에 50억 달러(약 7조 1645억 원)를 투자하며 항공 우주 사업과 공장 자동화 사업 분할을 요구했다.
패트릭 터커 FTI 컨설팅 수석 매니징 디렉터는 "2025년에는 CEO에 대한 압박이 지속되고 M&A 관련 제안도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히 그는 "지난 1~2년간 M&A 관련 요구 대신 경영진 책임 추궁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던 행동주의 펀드들이 이제 다시 M&A와 CEO압박이라는 두가지 전술을 함께 사용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