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인텔이 최고경영자(CEO) 교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며 근본적 혁신의 갈림길에 섰다.
2일(현지시각) 배런스는 인텔의 위기가 단순한 실적 부진을 넘어서 기술 패러다임 전환 실패에 기인한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2023년 예상 매출은 526억 달러로 겔싱어 취임 전인 2020년 대비 32% 감소했다. 영업활동 현금흐름도 같은 기간 354억 달러에서 115억 달러로 급감했고, 배당 중단과 함께 주가는 절반으로 하락했다.
인텔의 핵심 경쟁력이었던 반도체 제조 기술은 2018년 TSMC에 추월당한 이후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AI 반도체 시장에서의 부진은 특히 치명적이다. 가우디 AI 칩은 엔비디아의 CUDA 같은 소프트웨어 생태계 구축에 실패했고, 개발자들이 선호하는 AI 프레임워크와의 호환성 부족, 성능 최적화 도구의 미비로 시장 안착에 실패했다. 데이터센터 AI 부문 매출이 33억 달러로 전년 대비 13.1% 감소한 반면, 엔비디아는 79.7억 달러로 173.8% 증가해 양사의 기술력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파운드리 사업 전환도 난제다. 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에도 불구하고 수율 안정화가 지연되면서 대형 고객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에는 브로드컴의 테스트에서 실리콘 웨이퍼가 실패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미국 정부의 칩스법 지원은 당초 85억 달러에서 80억 달러 이하로 축소되어 재무적 부담이 더욱 가중되고 있다. 15%의 인력 감축과 설비투자 축소는 단기 실적 개선에 도움이 될 수 있으나, AI 시대 기술 경쟁력 확보라는 장기 과제와 상충된다.
물러난 겔싱어는 사실 위기의 인텔 구원자로 나섰지만 패배를 맛보고 물러났다. 그는 지난 대선 당시 바이든 당선자에게 미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와 경쟁력 회복 방안에 대한 친필 서신을 발송하는 등 미국 반도체 주도권 확보를 주도해 왔다. 이제 이를 주도한 겔싱어는 사라지고, 주도권은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잡았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CEO 선임이 인텔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1990년대 초 IBM을 회생시킨 루 거스너와 같은 비(非)기술 전문가 영입을 제안한다. 하지만 모바일과 AI 칩 시장 실기로 인텔이 직면한 위기는 당시 IBM보다 더 실존적이라는 평가다.
인수합병도 대안으로 거론되지만, 1000억 달러에 달하는 시가총액이 걸림돌이다. 모바일 칩 강자 퀄컴도 인텔의 규모를 이유로 인수 의사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회사 분할 후 매각이라는 시나리오도 부상하고 있다. 투자 은행가 출신인 프랭크 이어리 회장이 임시 경영을 맡게 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주목된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인텔의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삼성전자는 3나노 공정 양산을 통해 TSMC와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한편, 연간 생산능력 440만 장 규모의 텍사스 테일러 공장을 2024년 가동하며 미국 시장 공략을 가속화할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HBM(고대역폭 메모리) 시장에서 60% 이상의 점유율을 확보했으며, 차세대 제품 개발로 AI 반도체 성장의 주도권을 더욱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2025년 트럼프 재집권시 미국의 기술 보호주의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중국 반도체 기업에 대한 제재가 심화되면서, 인텔은 미국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동시에 반도체 장비와 원자재의 대중국 수출 통제가 강화되면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국 기업들에게 미국 시장 진출 기회인 동시에 중국 사업 재편이라는 과제를 안겨줄 것이다.
50년 넘게 반도체 산업을 주도해온 인텔의 위기는 기술 혁신과 시장 변화에 대한 신속한 대응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새로운 리더십이 AI 시대 경쟁력 회복과 파운드리 사업 안정화라는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글로벌 반도체 산업이 주목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