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美 금융기관 공식 제재 논의...은행가들 "반미 감정 확산" 우려

로이터통신은 지난 9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 최고경영자(CEO)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촉발한 관세 전쟁에 대응해 유럽이 미국 투자은행을 제재할 것을 촉구하는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고객 보이콧과 최악의 경우 공식적인 금융 제한까지 우려되고 있다.
로이터가 접촉한 6명 이상의 고위 은행가와 자문가들은 유럽연합 정부와 기업들이 자국 대출기관과 더 많은 거래를 추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두 명의 고위 임원은 두 은행업계 단체가 유럽에서 미국 은행의 활동을 제한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으며, 최소 두 곳의 주요 은행도 이 문제에 관한 내부 회의를 가졌다고 밝혔다.
EU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2021년 설계된 반강제기구(ACI)가 거론된다. 이 기구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 무기화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는 시점에 만들어졌으며, 외국 금융 서비스 기업에 제한을 가해 EU 시장 접근을 제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미 반미 정서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부과 이후 유럽 기업들에게 미국에 대한 계획된 투자를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JP모건 최고경영자 제이미 다이먼은 지난 8일 폭스 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미 몇 건의 채권 거래를 잃었다"며 "고객들은 단순히 미국 은행보다 현지 은행과 함께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고 밝혔다.
◇ EU-미국 간 무역갈등 심화... 금융제재는 "유럽에도 자해행위" 지적
EU 국가들은 지난주 미국에 대한 첫 번째 대응책을 승인했으며, 중국·캐나다와 함께 세계를 경기침체로 몰아넣을 수 있는 보복 조치에 나서고 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추가로 인상하는 한편, 일부 국가에 대한 신규 관세를 일시적으로 인하하겠다고 밝혔다.
마로스 세프코비치 EU 통상 집행위원은 지난 7일 "우리는 단일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도구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유럽중앙은행(ECB) 관계자들은 유로존 경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자금이 넉넉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유럽 금융 시스템에서 미국 은행들을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월스트리트 기업들은 파생상품을 포함한 증권 거래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LSEG 데이터에 따르면 JP모건은 2025년 1분기 동안 유럽에서 약 5억1400만 달러(약 7486억 원)의 투자은행 수수료를 벌어들여 전체 수수료 풀의 8.2%를 차지했다.
미국 은행들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해왔으며, 브렉시트 이후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됐다. 영국이 EU를 탈퇴했을 때 브뤼셀은 월스트리트 은행들에게 EU 내 자본과 현지 인력을 증설할 것을 요구했고, 그 결과 수천 개의 일자리가 창출됐다.
미국경제연구소(American Institute for Economic Research)의 정치경제학자 새뮤얼 그레그는 "유럽이 미국 금융 서비스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유럽에 자해 행위가 될 것"이라며 "이와 같은 제재는 미국 관세 인상으로 인해 유럽 경제에 입힌 피해를 가중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금융 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이 유럽 금융 시스템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미국 달러 자금 조달 라인을 차단할 가능성도 우려하고 있다. 로이터는 지난달 일부 유럽 관리들이 시장 스트레스 상황에서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달러 자금 제공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재무 임원은 "유럽 기업들이 자국 금융기관을 우선적으로 선택할지, 아니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미국 은행을 계속 이용할지가 관건"이라며 "현재 세계 경제가 보호무역주의로 기울고 있어 미국 은행들과 거래할 때 정치적 리스크가 따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감정적인 반미 정서는 일시적일 것"이라며 "결국 기업들은 감정보다 실질적인 경제적 이익을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